1960년대는?
전후 세대(베이비 붐)를 맞이하게 된 연대이자 경제적으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발전 및 성장기의 과정을 거치는 시기였기 때문에 경제의 태동연대라고도 불린다.
68혁명과 히피로 대표되는 일명 저항의 시대로도 대변된다. 성적, 문화적, 정치적 자유주의가 확산된 때 역시 1960년대였으며, 이때를 기점으로 서구권이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어 우리가 아는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인 모습으로 변했다. 또한 현재 우리가 접하는 여러 제품과 물건들의 기본 형태도 이때 잡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비틀즈 등 영국의 밴드들이 대중음악과 세계 문화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기도 했다.
1960년대 어려웠던 시절 한국의 모습을 영상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1960년대 어려웠던 시절 한국
1961년, 머리카락을 가발 공장에 팔기 위해 줄을 선 여성들의 모습
울음을 터뜨리는 소녀를 같이 온 어머니가 달래고 있다.
1961년, 당시 서울역 플랫폼 모습.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띈다.
6.25 전쟁을 겪지 않은 첫 세대인 1954년생이 초등학교 (당시 명칭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한복을 차려입은 어머니들의 손을 잡고 교정으로 향하는 모습.
1962년 경상남도의 장날 풍경
짐을 머리에 이고 장터로 향하는 사람들
강원도 춘천에서 칡뿌리를 말리는 주민의 분주한 모습
1962년, 대구에서 열린 우시장
1962년, 모내기가 한창인 서울시 성동구 논현동 (현재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1동, 논현2동)
1963년, 평범한 남해 어촌의 풍경
방과 후 초등학생들이 들판으로 소를 끌고 나가 풀을 먹이고 있다.
집의 재산인 소를 배불리 먹이고 잘 데리고 오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 당시 어린 학생들에게는 중요한 임무였다고 한다.
1964년,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의 턱걸이 연습이 한창인 교정
하나라도 더 해내려는 모습의 학생.
달리기를 겨루며 체육 활동을 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방영되었다.
고무신이 닳을까봐 맨발로 운동장을 달리는 학생들과 응원하는 친구들.
영유아사망률 1000명 당 218명. (2021년 세계 최악의 영아사망률을 기록하는 우간다의 2.3배)
신생아 5명 중 몸이 약한 1명은 첫돌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 시대였다.
아이들에게 야외 활동을 장려하여 체력과 면역력을 기르자는 표어가 방송되었다.
1964년, 한국전력 직원들이 경상북도 영양군에 전봇대를 설치하고 있다.
전기의 혜택을 받지 못하던 가정까지 전기가 들어가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보릿고개 넘기기 운동'이 한창인 시골의 분주한 모습
전국적으로 문맹 퇴치를 위한 운동이 시작되었다.
경북 영덕군에 내려온 대학생들이 글을 모르는 주민들을 모아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전국적으로 늘상 문제가 되었던 쥐떼 해결을 위해 '쥐잡기 운동'이 시작되었다.
잡힌 쥐를 보고 속이 시원한듯 웃는 어른들
1965년, 춘천 수력 발전소가 완공되었다. 산 능선에 올라선 시민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당시 고등학교의 수업 모습
교련 시간에 M1 총기 분해조립, 맨손으로 쇠봉 타기 연습을 하는 고등학생들.
전국에 큰 비가 내렸다. 잠긴 집과 들을 보고 망연자실한 사람들,
머리를 다친 동생을 돌보는 형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중부지방에서 피해가 가장 극심했던 청주 시민들이 힘을 합쳐 복구에 나서고 있다.
흙을 퍼내는 아버지들과, 갓난아이를 내려놓고 삽을 들어 복구를 돕는 어머니들
범람 위기의 청주 무심천에서 청주공업고등학교 학생들과 교사, 시민들이 힘을 합쳐
제방을 손보고 있다.
교복을 입은 청주중학교 1학년 학생들이 삽을 들고 수해 복구를 지원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에서 필리핀이 2배 이상 앞서던 시절,
거액을 들여 초빙한 필리핀 경제사절단이 내방했다. 일렬로 도열한 한국 관료들의 90도 인사와 환대에
경제사절단 단장인 필리핀 농림상 로드리게스와 필리핀 사절단이 흡족하게 웃고 있다.
1965년 1월, 뉴스에서 가장 중요한 소식으로 다루었던 첫 1인당 국민소득 세자리 돌파 (110달러)
1961년 70달러로 세계에서 두번째로 낮았던 1인당 국민소득의 증가를 새해 첫 뉴스로 꼽았다.
지나치게 과장된 그래프가 어이없지만 당시에는 매우 큰 소식이었던 모양이다.
1965년, 한국은 방글라데시를 2달러 차이로 처음으로 제쳤다.
파독 광부 예비소집에 모인 인원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듣고 있다.
서독 탄광으로 떠나기 위한 광부 모집에 최종 합격한 20대의 젊은 광부들
독일로 떠나기 전 마지막 밤.
배웅하는 가족, 지인들을 향해 거수경례를 올린 파독광부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일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다
한복을 입고 가족들을 향해 손수건을 흔드는 파독 간호사들
이륙 준비를 하는 여객기. 공항에 모인 시민들과 가족들이
파독 광부, 간호사들의 무사귀환을 바라며 손을 흔들고 있다.
독일에 도착한 파독 간호사들이 거동이 불편한 독일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40도가 넘는 온도, 지하 1200미터가 넘는 탄광의 끝자락에서
11시간의 작업을 끝마치고 나온 파독 광부들
당시 파독 광부 평균연령은 25세, 파독 간호사 평균연령은 23세였다.
(출처 : 한국직업건강간호학회)
국군의 남베트남 파병이 결정되었다.
만 38세의 나이에 맹호부대 사단장 겸 주월한국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채명신 소장(당시 38세, 6.25 참전)이 수통과 탄띠를 착용하고
출발 전 현충원에 묵념을 올리고 있다.
수도사단 맹호부대 사단장 - 소장 채명신 (당시 38세, 6.25 참전)
제9보병사단 백마부대 사단장 - 소장 이소동 (당시 38세, 6.25 참전)
해병 제2여단 청룡부대 여단장 - 준장 이봉출 (당시 39세, 6.25 참전)
1965년, 파병을 위해 도열한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맹호부대) 병력
전선으로 떠나는 제 9보병사단 (백마부대) 장병들의 결연한 표정
부동자세의 해병대 수색대 병사들
서울 시가지를 통과하는 파병 장병들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노인과
부채질을 해 주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이화여대 총장 김옥길 여사와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이 파병 장병들을 위해 쓴 문구가 방송되었다.
조국 떠나 만릿길
온 겨레의 마음이
그대들의 방패가 되리
아세아의 최정예,
우리 국군 가는 길
오직 승리뿐이다.
- 이화여대 총장 김옥길 외 재학생 일동
베트남 전선으로 향하는 국군 수송을 위해 36개편의 열차가 동원되었다.
수송 열차가 지나는 역, 마을 어귀마다 장병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시민들
대구역에서 잠시 정차한 수송열차.
국군 장병을 위해 기차역에서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중년 여성
한 병사가 역까지 배웅을 나온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부산항에서 승선 전, 부하들을 향해 악수하는 중대장을 바라보는 해병 소위 이학철 (당시 23세)
파월 1진 해병 청룡부대 제3대대 9중대장 김종세 대위 (중앙, 당시 28세),
박준교 상병 (왼쪽, 당시 22세), 정명국 일병(오른쪽, 당시 21세)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종세 대위:
월맹 정규군이 밀림에서 미군도 위협할 만큼 맹위를 떨치고 있고,
국군 장병들에 대해서 '단 한 사람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 할 것'이라고 비방하고 있지만
산악에서 단련된 소부대 전술, 체력과 같은 신체능력, 실제 전투에서의 호전성은 우리 병사들이
크게 앞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코 두렵거나 하는 마음은 들지 않습니다.
마지막 승선 인원인 맹호 혜산진부대 소속 소대장 소위 최정길(당시 24세)이
부산시 부시장을 비롯한 환송 인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당시 국내 최대의 여성단체 한국 부인회 회원들이 맹호부대 장병들을 환송하고 있다.
맹 호
환 이겨서 돌아오라 송
- 한국 부인회 부산시 지부
떠나는 장병들을 환송하는 부산 시민들과 수송선 난간을 가득 메운 장병들.
출발하는 수송선. 부산 시민들의 응원에 군가로 화답하는 장병들
멀어지는 부산항을 바라보는 해병 병사의 모습
1인당 국민소득 110달러 시절. 성대한 위문공연도, 거창한 위문품도 없었지만
시민들은 장병들의 무사귀환을 진심으로 빌어주었다.
첫 국내 기술로 만든 라디오가 시판되었다. 납땜질에 열중하는 어린 여공들
'벌거벗은 산에 나무를 심자'
식목일에 나무를 심기 위해 산으로 향하는 국민들.
남녀노소 민둥산에 나무를 심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가을 날, 고등학생들이 전교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동장 흙바닥 위에서 유도 대결을 펼치고 있다.
1967년, 제2회 전국학생씨름대회. 씨름 프로대회가 존재치 않던 시절, (씨름 프로대회는 80년대)
전국 고등학교에서 힘 좀 쓴다는 학생들이 모였다.
다른 지역 학생들의 경기를 살펴보는 서울 고등학생들.
치열한 결승전, 경북 영신고등학교 학생이 우승을 차지했다.
강원도 삼척시에 유례없는 대폭설이 내렸다. 지붕에 쌓인 눈을 치우는 주민들.
생활 체육으로 나날이 인기를 더해가는 씨름이 소개되었다.
씨름 대회를 구경하는 수많은 인파들.
국군 장성들이 베트남 전선을 방문했다.
전쟁터에서 경계근무 중인 해병 병사의 덥수룩한 수염을 만지며 웃는 육군참모총장.
주월 맹호부대 병사들이 시멘트로 만든 역기로 밀리터리 프레스를 하며 체력 단련을 하고 있다.
대다수가 임관과 동시에 베트남 전선으로 파병될 ROTC 5기생 생도들이
대간첩작전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교관으로부터 산악 게릴라전 교육을 듣고 있다.
'웃지않는 한국 해병들' - 미국 UPI 통신 보도
1967년, 짜빈동 전투 에서 중대 병력으로 월맹 정규군 정예 1개연대 병력과
(호치민 휘하의 월맹군 제2사단 1연대) 맞붙어 승리한 해병 11중대 장병들이
미군의 초청을 받아 계단 위에서 미군의 위문 공연을 지켜보고 있다.
선글라스를 낀 정경진 대위 (당시 28세, 중대장)와 김용길 중사 (좌측, 당시 26세),
중앙에서 카메라를 노려보는 어느 청룡부대 11중대 병사가 카메라에 담겼다.
서울 운동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 복싱 세계 주니어미들급 챔피언인
'철권' 김기수 (당시 27세)가 도전자 프레디 리틀 (미국)과 15라운드까지 맞붙고 있다.
이를 악물고 덤비는 김기수의 기세에 밀리는 프레디 리틀
기립박수로 환호하는 시민들
타이들 방어에 성공한 김기수(당시 27세)의 기념촬영
1968년, 부산시 풍경
1968년, 서울의 모습
하늘에서 본 1968년 서울
첫 개통한 아현고가의 모습. 자전거와 자동차가 함께 다니고 있다.
1969년, 한강철교 복구공사, 작업에 열중하는 현대건설 노동자들의 모습
서울과 부산을 잇는 한반도 최초의 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 공사 현장의 모습
부족한 중장비 대신 인부들이 달라붙어 바위를 깨고 길을 닦고 있다.
1969년, 나룻배들이 경부고속도로 낙동강 방면 공사에 쓰일 석재를 운반하고 있다.
1969년 연말,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서 '포항제철소' 공사가 시작되었다. 허허벌판인 영일만의 모습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다.
실패하면 우향우 해서 영일만에 빠져 죽자
제철보국(製鐵保國)을 우리 인생의 신조로 삼자.
-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사장 박태준
1970년 1월 1일, 영일만 앞바다에 떠오르는 일출
삼천만이 힘을 합치면 역사는 바뀐다는 내용의 표어가 방송되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삼천만 하나된 힘
역사를 바꾸리라.
참 옛날 자료, 특히 영상을 보면 너무 낯설면서도 그시절 우리가 얼마나 못살았는지, 세도정치와 식민지배와 전쟁까지, 한세기 반이 넘는 정체된 역사의 상처가 실감이 나고, 또 정말 남북한이 한 뿌리였다는 것은 지금의 남한보다는 북한과 더 닮은 옛 남한의 모습을 보면 실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확실히 옛 한국의 영상을 보고 있으면 느끼게 되는 부분은, 우리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 지금의 한국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분들의 피와 땀과 눈물과 수고가 있었고,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너무 당연하게만 여기고 감사해 하지 않은건 아닌지 돌이켜보게 됩니다.
물론, 그동안 이악물고 앞만보며 달려오며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분명히 희생이 있었고, 억압이 있었습니다. 압축성장과 독재의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우리 힘으로 피를 흘려 민주주의를 쟁취했지만 아직도 한국인의 사고방식은 민주적이라기보단 계급적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희생이 마냥 헛된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주변을 둘러봐도 수십년간 독재에 시달리고 가난에 허덕이는 나라가 있고, 경제는 발전했지만 피를 흘리고도 민주주의를 얻지 못하고 그 기억마저 잃어버린 나라와 경제도 발전했고 민주주의도 있지만, 피를 흘리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단지 공짜로 주어져서 그 소중함도 모르고 국민들도 그 의미에 대해 깊게 생각 안 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비록 값을 치렀을지언정 올바른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한국에서 우리 청년들의 눈에 어른거리는 미래는 마냥 밝지만은 않습니다.
앞으로 한국이 더 발전할지, 정체될지 아니면 쇠락할지는 알 수 없고 왠지 부정적인 쪽으로 마음의 저울이 기울어가는 나날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한국에서 우리가 누리는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익숙함에 속아 그 소중함을 잊어버리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김구 선생께 가히 보여드릴만한, 비록 반쪽 뿐이지만 찬란한 문화로 세계에서 빛나는 한국을 어떻게 이룩하게 되었는지를 이 게시글을 쓰며 다시 한번 떠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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