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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34년전 천안문 항쟁 당시 모습들

by 채소아빠 2023. 6. 10.

천안문 6.4 항쟁

중국 천안문 광장에서 대학생들과 시민들의 주도로 1989년 4월 15일에 시작되었으며, 중국 공산당 정부의 군대가 전차들을 앞세워 유혈 진압하여 1989년 6월 4일에 비극적으로 끝을 맺은 중국의 민주화 운동.

 
 
 
 
 
 
 
 
 
 

 

“시위하러 가는 중입니다.”
“왜 가는거죠?”
“ 제 의무니까요. (MY DUTY) “

1989. 6. 4.

오늘은 중국에서 천안문 항쟁이 일어난 지 34주년인 동시에,
중국 공산당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던 날입니다.

천안문 항쟁의 명칭 논란

학자들이 천안문 항쟁 혹은 천안문 민주화 운동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공식 명칭은 아니다.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를 감안하여 한국에서도 거의 천안문 사태로 부른다. 따라서 언론에서도 거의 대부분 천안문 사태라고 언급한다. 일각에서는 천안문 사태라는 명칭이 민주화 운동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 위해 쓰인다고 비판한다.

강경 반중 인사들은 피의 일요일, 천안문 대학살(Tiananmen Massacre) 등으로 부른다. 다수 학자들은 '1989년 톈안먼 광장 항쟁(Tiananmen Square Protests of 1989)'이라고 부른다. [12] 1976년 천안문 사태와 구분하는 뜻으로 '제2차 천안문 사태'라는 명칭도 제법 알려져 있다.

중국 정부 당국에서는 과거 '반혁명폭란'이라고 칭했으며, 이후 공산당 역사결의를 통한 현재 공식 입장은 '1989년 춘하지계 정치풍파'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철저한 검열을 통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취급하기 때문에, 외교부에서 외신 기자들의 관련 질문에 대응할 때도 "이미 정론이 나온 사안"이라며 직접적인 언급 자체를 거부한다.

중국 관변학자들은 '톈안먼 광장 사건(Tiananmen Square Incident)'이나 '6.4 사태(June Fourth Incident)'라는 용어를 쓴다. 좀 더 과격하게 표현할 때에는 '1989년 반정부정치폭란'이라고도 한다. 또는 공산당의 당론을 따라 '1989년 출하지계 정치풍파'라는 보다 순화된 표현을 쓰기도 한다. 중화권에서는 유혈 진압이 일어난 6월 4일에서 따와서 '류쓰(六四)', '육사사건(六四事件)'이라고 부른다. 중국 인터넷에서는 六四를 그대로 썼다가는 바로 검열을 받아서 그런지 5월 35일, VIIV, 8², 8964 등 다양하게 부르는 모양이다.

 

주도 계층

不自由毋宁死
LIBERTY or DEATH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All power belongs to the people.
모든 권력은 인민의 것이다.
反官僚, 反腐, 廉潔的中國共產黨萬歲!
반관료, 반부패, 청렴한 공산당 만세!
杜絶權力腐敗和腐敗! 確保機會均等!
권력 비리 부정 부패를 척결하라!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라!
人民不會忘記
인민은 잊지 않는다.
 
 

지식인들, 대학생들이 주도했지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각계각층의 시민들도 많이 참여했다. 그들 중에는 상인, 노동자, 언론인, 의사, 교사, 대학 교수, 심지어는 공안, 법조인, 공무원도 있었으며 적게는 9살짜리 아이에서 많게는 백발의 노인까지 참여한 범대중적 평화 시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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