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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명피해가 많았던(사망자수 100명 이상) 대한민국 참사 목록

by 채소아빠 2023. 2. 14.


대한민국의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단일 사건과 사고의 순위입니다.

대한민국이 아닌 국외에서 발생했더라도 피해자의 대다수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목록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목록의 과포화를 막기위해 1945년 8.15 광복 이후, 사망자가 100명 이상인 경우부터 등재하였습니다.

 

 

 

 

 

 

15위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사고(사망101명 / 부상 202명)

1995년,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상인네거리에 들어설 예정으로 지반 공사 중이던 대구백화점 상인점 담당 (주)표준개발의 인부가 실수로 가스관을 파손시켰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 누출된 가스가 하수관을 통해 대구 지하철 1호선 상인역 공사장으로 유입되었다는 것이고, 한동안 괴어 있다가 폭발을 일으켰다 [2]. 폭발 후 50m에 달하는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400m에 달하는 건설 현장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 폭발 사고로 사망 101명, 부상 202명 등 총 300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차량 150대 이상, 건물 80여 채가 파손되는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겨우 인부 한 명의 실수가 참혹한 결과를 부른 것이다.

특히 사건 현장이 학교 근처인 데다 등교 시간이라는 점 때문에 학생 사상자가 많이 나왔다. 유품으로 피 묻은 책가방, 불에 탄 교과서, 참고서가 많아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당시 사진 중에 피범벅이 된 책가방을 수습하다가 울음을 터뜨리는 자원봉사자의 모습도 있었다. 특히 근처 영남중학교 학생들의 피해가 컸는데, 사망자 101명 중 절반 가까이에 달하는 43명이 이 영남중학교 학생이다. 그나마 영남중학교를 제외한 나머지 인근 중학교들은 그날이 금요일이라서 모두 소풍을 나간 덕분에 피해가 적었다고 한다. 사고 후 1년이 지난 1996년에 영남중학교 희생자 유족과 교사, 학우들이 쓴 글을 모은 책이 발행되기도 했는데, 이 책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람 가능하다.

또한 폭발 당시 튀어오른 복공판이나 고열 때문에 크게 훼손된 시신이 많아 주변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폭발 현장에 인접해 있던 상가들은 이 여파로 마치 폐허를 방불케 할 만큼 훼손되었고, 근처 아파트 베란다 새시는 강력한 폭발에 의해 모두 깨졌다. 또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까지도 굉음이 들릴 정도였다. 이로 인해 근처 아파트 주민들이 깨진 유리에 부상을 입기도 했고 재산피해 역시 상당했다.

이 와중에도 여러 의인들이 나타나 많은 생명을 구했다. 교통정리를 하던 52세의 이용선 씨가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 5명의 목숨을 구하고 공사장의 부상자를 구하기 위해 지하로 내려가다가 복공판이 뒤집어지는 바람에 10여 미터 아래로 추락해 숨졌으며, 29세의 버스기사 임해남이 자신의 버스 승객들은 물론 근처 차량의 여덟 명의 시민들도 구했다. 사고 소식이 전해지자 2천 명의 대구시민이 몰려들어 헌혈을 했으며 하루 만에 전국 각지에서 40억 원에 가까운 성금이 모였다.

 

 

14위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사망 115명 / 생존 0명)

1987년 11월 29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항한 대한항공 보잉 707 여객기가 인도양 상공에서 실종된 사건. KAL기 폭파 사건이라고 하면 보통 이 사건을 의미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 지령에 의한 공중폭발'로 결론을 지었으며, 조사 결과 북한 정권의 지령을 받고 일본인으로 위장한 특수공작원 김승일, 김현희 2인조가 액체 시한 폭탄으로 비행기를 폭파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사건 자체는 북한의 소행으로 명백히 결론 났지만, 세부적인 의혹이나 떡밥 등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음모론이 돌고 있다. 심지어 김현희에게 물어봐도 그녀 역시 모르는 분야라서 더욱 그렇다.

국책 항공사의 국적기가 공중 폭파 테러를 당해 탑승객 전원이 사망한, 항공 사건사고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참사였음에도 대한민국 정부의 대응은 굉장히 미온적이었다. 부실한 인력으로 구성된 조사단에, 추락 위치를 잘못 짚어 엉뚱한 곳을 수색했으며, 도중에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현 미얀마)과의 대립과 장비 부족 등을 이유로 열흘 만에 수색대를 철수했다. 이후 현재까지 동체 수색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가 2019년에 들어 대구 MBC의 수중 탐사에서 858편으로 추정되는 동체가 확인되었다. 

 

 

13위 중국국제항공 129편 추락사고(사망 130명 / 생존 36명) 

2002년 4월 15일 오전 11시 45분경 중국국제항공(Air China) 소속 CCA129편 보잉 767-200ER 여객기가 김해국제공항에서 4.6km 떨어진 경상남도 김해시 지내동 동원아파트 뒤편의 돗대산(해발 380m) 기슭에 추락한 사고이다. 이 곳은 남해고속도로 김해 시내 구간에서 김해 시내 쪽에 보이는 약간 낮은 산. 김해 JC와 북보산 TG 사이에 있다. 그래서 사고 후 잔해가 치워지기까지 남해고속도로에서 여객기 잔해가 보였다는 얘기가 있다.

사고기에는 한국인 136명과 중국인이 대부분인 외국인 19명 등 승객 155명과 승무원 12명 총 167명이 탑승하고 있었으며, 이 가운데 129명이 사망하였다. 한국인이 많은 이유는 IATA 규정에는 무조건 자국민에게 비싼 값에 자국 국적기 티켓을 팔아야 되는 규정이 있으며 부산 출발을 통해 베이징 서우두 국제공항을 통한 전세계 환승 연계 편까지 제공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일 노선을 운항하는 대한항공 비행기의 경우 중국 승객이 많다. 같은 이유로 2013년 7월 아시아나항공의 사고 때는 중국인이 많았다. 에어 프랑스 264편의 러시아 비상 착륙 때 승객 대부분이 한국인이었으니 맞는 말이다.

이 사고는 현재까지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항공사고 중 최악의 항공사고이며 1993년 7월 26일에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 마산리에서 추락한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사고보다 인명피해가 많이났던 사고이다. 또한 이 사고로 인해 김해공항 안전문제가 도마 위에 올라 김해공항 이전논란의 시발점이 되었던 사고이다.

 

 

 

 

 

12위 연호 침몰 사건(사망 140명 / 부상 1명)

여객선 연호는 전라남도 목포시와 해남군 황산면 연호리간을 운행하는 84마력, 34.5톤급의 정기 여객선으로, 정원은 선원 8명을 포함하여 86명이며, 선령은 21년이었다.

보도에 의하면, 1963년 1월 18일 오전 8시 연호리를 출발한 연호는 낮 12시경 영암군 삼호면 가지도 앞 해상에서 돌풍을 만나 선체가 기울어지면서 침몰하였다. 생존자와 부근을 운행하던 여객선 용당호 관계자의 목격에 의하면, 강풍에 배가 기울어지자 선실까지 물결이 들어왔고, 갑판에 있던 몇 사람은 뛰어 내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선실에 갇힌 채 5분 내에 침몰하였다고 하였다.

이 사고로 생존자 1명을 제외한 140명 전원이 사망했다.

 

11위 이태원 압사사고(사망 159명 / 부상 294명)

사고 당일 오후 10시경, 이태원 해밀톤호텔 서측 골목 저지대 중간(저지대 입구에서 25m쯤 올라간 곳)의 18.24m²(5.5평)공간에서 병목 현상이 일어나 행인끼리 우왕좌왕하는 과정에 서로 뒤엉켰고, 점차 밀집되는 상황에서 불편한 자세를 유지한 채 응급 구조를 기다려야만 했다.

한편 해밀톤호텔 북서측 삼거리(고지대)[8]에서는 20분 만에 막대한 인파가 빠르게 유입되는 바람에 서측 골목 중간 쪽 18.24m² 공간의 상황은 순식간에 심각해져만 갔다. 사고 초반 뒤쪽 인파였던 사람들도 앞쪽으로 누적되어 갔고, 뒤쪽 인파에서 세 차례 정도 밀치자 사람들이 우르르 넘어져 이른바 '연쇄 깔림'으로 인해 앞쪽 참변이 가중됐다. (대략 18톤·초의 충격량)

설상가상으로 스마트폰을 꺼낼 상황이 아니었던 데다[ 트래픽 과잉으로 인해 전화와 데이터 통신까지 먹통인 상황 속에서 뒤쪽 인파는 이때까지도 (미디어를 통한)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하기란 불가능했고 그저 멈출 줄 모르며 내려오고만 있었다. 앞쪽 인파에서 청색증 및 구토 현상이 눈에 띄게 증가하자 일제히 '뒤로! 뒤로!'를 외치며 18.24m² 뒤쪽 인파가 대부분 역행하여 빠져나갔으나, 18.24m² 에는 이미 300여 명의 사상자끼리 의식을 잃고 몸이 껴서 빼내기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이미 외상성 질식이, 밑에 깔린 사람들은 장기 파손으로 인한 복부 팽창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18.24m²의 공간에서 150여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한편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구급차들의 도로 상황이 원활하지 못했으며 영상 최초 신고 이후 40분 이상이 지난 23시가 되어서야 경찰의 도로 통제에 따른 구급차 진입이 비로소 원활해졌다고 한다. 문현철 숭실대 재난안전관리학과 교수는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구급차가 들어오는 건 가능했지만 수많은 구급차가 서로 뒤엉키면서 인근 가용 병원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지체됐다고 말했다. 더구나 구급차 이송은 부상자가 아닌 사망자가 먼저 호송되는 등 혼란이 극심했다.

 

10위 YTL30호 침몰 사건(사망 159명 / 생존 157명)

1974년 2월 22일 (금), 오전 11시 경상남도 통영(당시 충무) 앞바다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항내 예인정(YTL)이 침몰해 해군과 해양경찰 전경 훈련병 159명이 숨졌던 대참사이다. 대한민국 해군 역사상 최악의 수치로,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전시가 아닌 평시 해난사고 중 세계 해군 사상 가장 큰 인명손실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이날 사고는 해군신병 159기 및 이들과 함께 신병훈련을 받던 해경 11기 훈련병 316명이 해군 신병 훈련의 8주 차 훈련일정으로 충무공 전적지 견학과 충렬사 참배를 하고 복귀하고자 YTL을 타고 모함인 전차상륙함 LST-815 '북한함'으로 이동하던 중, 갑자기 몰아닥친 파도를 피하려고 YTL이 급선회를 시도하다 균형을 잃고 전복, 침몰하면서 비롯되었다.

사건은 명백한 인재(人災)였다.

  • 당시 통영에는 폭풍주의보가 내려졌는데, 그럼에도 밤톨만한 YTL을 타고 충렬사 참배를 강행한다. 결국 사고 후 훈련병 양성과정에서 충렬사 참배를 폐지했고, 현재는 부사관후보생과 장교 양성과정에만 있다.
  • 게다가 그 YTL의 정원은 150명, 한마디로 정원의 2배가 넘는 사람이 승선한 것이다.
  • 거기에 사고 당시 순직한 정장의 조함 미숙도 사고를 불렀다.
  • 훈련병들이 민무늬 전투복에 전투화 차림인것도 사상자를 늘리는 데 한몫했다. 물에 빠지면 헤엄에 방해가 되는 신발을 신속히 벗어야 하는데, 목이 길고 무거운 전투화는 이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이 사고는 1993년 10월 10일 전북 부안군에서 일어난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의 경우와 원인이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40년 후에 벌어진 세월호 참사의 원인과도 비슷하다.

 

 

 

 

 

9위 대연각호텔 화재(사망 166명 / 실종 25명 / 부상 68명)

1971년 12월 25일에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동의 '대연각(大然閣) 호텔'에서 발생한 대한민국 최악의 화재 사고. 세계 최대의 화재 사고들 중 하나이며, 호텔 화재 중에서는 단연 최대 사고. 총 사망자 166명(추락사 38명), 부상자 68명, 실종 25명이 나왔다.

사건 당일은 크리스마스였기 때문에 호텔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던 상태라 엄청난 사망자가 발생했다. 사건에 휘말린 인물들 중에는 주한 대만 대사관 위셴룽(余先榮) 공사 같은 귀빈도 있었다. 11층에 묵고 있던 공사는 10시간 만에 구조되었고 그를 구조한 소방 대원들은 전원 1계급 특진했지만, 안타깝게도 공사는 화재 당시 호흡기에 중화상을 입어 투병 끝에 1972년 1월 4일 사망하였다. 주한터키대사관 무관 파질 유즈 바기오 글루 대령도 화재로 그 자리에서 숨졌다.

 

8위 대구 지하철 참사(사망 192명 / 실종 6명 / 부상 151명)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에서 발생한 방화 사건. 대한민국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역대 최악의 지하철 사고로 손꼽히는 대형참사로, 전 세계 지하철 사고 사망자 수 2위를 기록한 철도 사고이다. 대한민국에서 철도 관련으로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기록한 사고로, 192명이 사망했다.

뇌졸중으로 인한 반신불수와 심한 우울증을 앓던 김대한(당시 56세)이 자신의 신변을 비관하다 자살을 하기 위해 09시 30분경, 대구광역시 달서구 송현동에 있는 송현역에서 1079 열차 지하철에 올라탔다. 김대한은 송현역 근처에 있는 주유소에서 휘발유 2L를 구입한 상태로 열차에 승차했다. 현재는 철도안전법 상 화재를 일으킬 수 있는 위험 물질을 열차에 소지하고 탑승하는 것이 제한되어 있으나, 당시에는 그런 법이 없었기 때문에 김대한은 아무런 제지 없이 열차에 승차할 수 있었다.

9시 51분 경, 1079 열차가 전역인 반월당역을 출발하자 김 씨는 라이터를 만지작 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반대편에 앉아있던 승객 전 모 씨가 "왜 자꾸 라이터를 키는 거예요!"라고 큰 소리로 항의하자 김대한은 행동을 멈추려는 듯했다.

09시 52분 경, 1079 열차가 대구광역시 중구 중앙대로에 있는 중앙로역에 정차하는 순간, 김대한은 미리 들고 있던 석유 플라스틱 통에 불을 붙였다. 주변 승객들은 당황해하였고, 승객들이 그를 제지하려는 찰나, 불이 그의 옷에 옮겨 붙자 놀란 김대한은 휘발유 통을 바닥에 던졌고, 불이 삽시간에 전동차 의자와 바닥 천장에 옮겨 붙어 결국 수 초만에 큰 불이 발생하였다. 당시 열차는 의자부터 바닥까지 전부 불에 타는 가연재 소질이었기 때문에, 불이 번지는 데는 크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행히 당시 1079 열차는 중앙로역에 정차 중이었고 많은 승객들이 열려 있던 출입문을 통해 대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독가스가 워낙 심해 미처 대피하지 못한 승객도 많아, 1079 열차에서도 전체 사망자 192명 중 49명이 사망했다.

 

 

7위 대한항공 801편 추락사고(사망 228명 / 생존 26명)

1997년 8월 6일 오전 1시 43분경(현지 시각) 서울 김포국제공항발 대한항공 801편, 테일넘버 HL7468이 미국령 괌의 안토니오 B. 원 팻 국제공항으로의 접근 중 추락, 승객 254명 중 228명이 사망한 사고이다.

이 사고는 대한항공 창립 사상 사망 사고 2위를 기록하였으며(1위는 007편), 더불어 대한민국의 단일 항공기 사고 2위다. 세계 항공 사고 순위로는 공동 22위(다른 한 사고는 AF447)이며, 또한 보잉 747-300의 유일한 대형 사고이다. 또한 이 사고는 대한항공 소속 항공기가 마지막으로 일반인 탑승객 사망사고를 낸 사고이기도 하다.

801편은 악천후 속에서 착륙 준비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으나, 충돌 6분 57초 전, 갑자기 비행기에 활공각 지시기의 신호가 잡혀 박용철 기장과 송경호 부기장은 혼란에 빠진다. 그 때문인지 고도 확인 절차를 생략함과 동시에 규정 고도를 무시하였다. 사고 이후, 그 신호는 지상의 다른 장비에서 송출된 것으로 밝혀졌다.

801편은 계속 내려가면 활주로가 보일 것이라 판단, 순식간에 하강했고, 날씨가 좋지 않아 고도를 내려도 활주로가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801편은 1,440ft에서 하강 이후부터는 계단 모양이 나타나지 않고, 일직선으로 하강하였다.

충돌하기 12초 전에 대지접근 경보장치(GPWS)에서는 경보가 여러 번 울렸고 부기장도 "접근 실패(missed approach)"를 외쳤지만, 기장은 이를 무시했다. 충돌 2.3초 전에 가서야 기장은 "고 어라운드(복행)"이라고 말하며 복행 선언을 한다. 하지만, 관성의 법칙 상 몇 백 톤의 보잉747기가 한 번에 급상승할 수는 없기에 801편은 기수가 8도 정도 들린 채 메인 랜딩기어가 송유관을 친 뒤 뒷바퀴부터 니미츠 힐로 추락하게 되었고 주 날개의 연료 탱크와 462L의 면세주에 불이 붙어 8시간이나 타올랐고 추락 후 많은 승객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6위 대한항공 007편 격추사건(사망 269명 / 생존 0명)

대한항공 007편 격추사건(영어: Korean Air Lines Flight 007)은 1983년 9월 1일에 미국 뉴욕 시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을 출발, 앵커리지를 경유해서 김포국제공항으로 오던 대한항공 소속의 007편 여객기가 비행 중 소비에트 연방의 영공에서 소비에트 연방 공군 소속의 수호이 15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사할린 서쪽에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이 숨진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래리 맥도널드 미국 조지아주 민주당 하원 의원을 포함한 16개국 269명의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였다. 비무장 여객기에 대한 소비에트 연방의 전투기의 공격으로 인한 격추 사건으로 대한민국 및 서방 국가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9월 2일부터 3일간 대한민국에서는 특별 애도 기간을 갖고 관공서와 가정에서 조기를 게양했으며, 정부는 사고 발생 직후 유엔 안보리 소집을 요청, 격추에 대한 항의를 했고 각국은 소비에트 연방 국적의 항공기에 대한 운항 중지, 모스크바 취항 거부 등의 제재 조치를 했다. 9월 5일 유가족 53명을 태운 페리는 사고현장에 갔지만, 시신을 찾지 못하였다. 대한민국에서 일반적으로 김현희의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과 함께 양대 KAL기 사건으로 회자되곤 한다.

 

 

5위 서해훼리호 침몰사고(사망 292명 / 생존 70명)

1990년 10월 건조된 110톤급 철선이다. 길이 33.9m, 폭 6.2m에 평균 시속 12노트로, 부안과 격포 사이를 1일 1회 정기 운항하였다. 정원은 승무원 14명을 포함, 221명이었다.

서해훼리호는 1993년 10월 10일 9시 40분경 362명의 승객과 화물 16톤을 적재하고 위도 파장금항을 떠나 부안 격포항으로 향하여 출발하였다. 10시 10분쯤에 임수도 부근 해상에서 돌풍을 만났고, 회항하려고 뱃머리를 돌리던 도중에 파도를 맞아 심하게 흔들리면서 곧바로 전복되고 침몰되었다. 서해훼리호에는 9개의 구명정이 있었으나, 그중 2개만이 작동되었다. 생존자들은 2척의 구명정에 나누어 탔고, 부유물에 매달렸다.

사고 직후 인근에서 조업중이던 어선들이 조난 사실을 알리고 40여 명의 생존자를 구조하였다.

사고가 난 1시간여 후, 강풍과 파도 속에서 어선과 헬기와 군경 함정을 동원한 수색작업이 시작되어, 10월 10일 22시까지 70명의 생존자가 구조되고 51구의 시신이 인양되었다.

초기에는 사망·실종자를 140명으로 추정하였으나, 시신의 인양이 진행되면서 사망자수가 크게 늘어났다. 10월 15일에는 선장과 기관장, 갑판장의 시신이 침몰한 선박의 통신실에서 발견되었고, 11월 2일에는 신고된 마지막 실종자를 끝으로 모두 292구의 시신이 인양되었다.

선체의 인양에는 구조함인 구미함의 특수대원, 9,754톤급의 해운항만청 소속 인양선 설악호, 206톤급의 예인선, 52톤급의 양묘선과 이들에 탑승한 200여 명의 승무원이 참여한다고 보도되었다. 10월 17일 선체를 인양하였으나, 도중에 연결한 줄이 끊어져 다시 침몰하였고, 10월 27일 다시 인양하였다.

 

4위 세월호 침몰사고(사망 299명 / 실종 5명 / 생존 172명)

이 사건은 안전불감증에 빠져 있던 한국의 안전 관리 실태와 혼란스러운 사회의 극치를 보여준 비극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참사로 인해 당시 출범 2년 차였던 박근혜 정부는 물론 대한민국 사회계, 정치계는 모두 엄청난 후폭풍과 침체, 그리고 공황에 시달렸다. 이후 언론, 정계, 경제계, 교육계 그리고 문화계에서 수많은 갈등을 야기한 증폭제 역할을 하는 사건이 되었다. 21세기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 큰 사회적 파장과 영향력을 가진 사건 중 하나이기도 하다.

세월호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과 교사 14명이 탑승하였으며 어린 학생들의 피해가 컸던 대형 참사였다. 이 참사로 피해 학생이 집중된 경기도 안산시와 전라남도 진도군은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었으며 국민들의 사회적 충격이 매우 컸던 국가 대형 참사였다. 이 사고 이후 대한민국은 갈등과 분열 등 엄청난 후폭풍이 닥쳤고 대한민국 현대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고였으며 현재도 진행형이다. 또한 자녀교육에 열과 성을 다하기로 소문난 한국 학부모들의 마인드를 크게 뒤바꾸어놓은 전환점이 된 대사건이다.

대한민국의 해난사고 중 다섯 번째로 많은 사상자를 냈고, 502명이 사망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269명이 사망한 창경호 침몰 사고와 362명이 사망한 남영호 침몰 사고와 292명이 사망한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이후 5번째로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재난 사고이다. 20세기에 일어난 위의 사건들과 달리 21세기에 일어난 대형 참사이기에 국민들의 충격이 그만큼 컸다. 이 사고는 전 국민들에게 안전의 중요성을 결정적으로 깨닫게 했다.

대한민국의 수학여행 사건 사고 중에서는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한 학교의 학년 전체가 참사를 당한 것 또한 최초이다. 이전까지 최대의 참사는 1970년 경서중학교 학생 45명이 사망한 모산 수학여행 참사였다

 

 

 

 

 

3위 남영호 침몰사고(사망 326명 / 생존 12명)

남영호는 남영해운 소속의 선박으로, 1967년 12월 경남조선회사에서 제작하였다. 길이 43m에 폭 7.2m, 362톤급이며, 1400마력에 15노트의 속력을 낼 수 있었다.

1968년 3월 5일 처음으로 부산과 제주 사이를 오가는 정기여객선으로서의 운항을 시작하였다. 승객 정원은 295명(1등 20명, 2등 38명, 3등 237명), 선원은 19명이었다. 사고 후의 조사에서 승객 정원은 321명, 적재 정량은 130톤으로 밝혀졌다.


사고가 발생한 1970년 12월 14일은 12일부터 제주 일원에 발효된 폭풍주의보가 해제된 직후였다. 남영호는 14일 17시 승객 158명과 화물 150톤을 싣고 출항하였고, 성산포에 기항하여 승객 98명을 더 태우고 21시 40분에 부산을 향해 출항하였으며, 15일 새벽 1시 25분에 제주(현재는 여수) 상백도 동쪽 25마일 해상에서 침몰, 실종되었다고 보도되었다. 하지만, 보도 내용과는 달리 실제 승객은 338명, 화물은 540톤을 넘었음이 이후의 조사로 밝혀졌다.

 

 

2위 창경호 침몰사고(사망 330명 / 생존 8명)

창경호 침몰 사고(昌景號浸沒事故)는 1953년 1월 9일 전남 여수항에서 부산항으로 가던 정기 여객선 창경호가 경상남도 부산시(현 부산광역시) 서남쪽 다대포 앞바다 거북섬 부근에서 강풍을 만나 침몰한 사고이다. 승선인원 중 선장과 선원 3명 학생 2명 군인 2명을 제외하고 300여 명이 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1953년 1월 9일 오후 2시에 전남 여수항을 출발하여 부산항으로 가던 대동상선 소속의 150톤급 정기 여객선 창경호가 오후 10시 40분경 부산 서남쪽 8km쯤 지점에 있는 다대포 앞바다 거북섬에서 200m 떨어진 지점에서 왼쪽으로 급격하게 기울면서 20~30분 만에 침몰하였다. 당시 창경호는 승객 2백 수십 명과 쌀 450 가마를 싣고 있었으나, 선장과 선원 3명, 승객 3명만이 구조되었다고 보도되었다. 며칠 후, 또 한 명의 생존자가 있음이 알려져 생존자는 8명으로 늘어났다.

 

1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사망 502명 / 실종 20명 / 부상 937명)

1995년 6월 29일 목요일 17시 52분 발생한 대규모 건축물 붕괴 사고. 서울의 삼풍백화점이 붕괴하여 사상자 약 1500명이 발생하였다.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이후 2개월 만이며, 성수대교 붕괴 사고 이후 8개월 만의 사고였다. 세계 건물 붕괴 관련 참사 중 사망자 11위이다. 

원인이 부실공사로 밝혀지자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함께 안전불감증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었고, 전국적인 건축물 안전실태 조사와 건축법의 강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매우 큰 충격을 주어 많은 작품들에서 소재로 삼기도 했다. 고객의 생명보다 자신의 회사에 대한 티끌만한 이익을 더 중시했던 삼풍건설산업의 모습에 대국민 분노가 들끓게 되었고 앞선 성수대교 사건과 더불어 문민정부에 사고 공화국이란 오명을 씌어버린 대표적인 사례로 남게 되었으며 한편으로 이 사건은 곧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던 이른바 '천민자본주의'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 되기도 했다.

삼풍백화점 붕괴참사 전시관은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광릉수목원로 1040에 있으며, 사고 현장에서 32 km 이상 떨어져 있다.

원래 삼풍백화점은 '삼풍랜드'라는 이름으로 바로 옆에 있던 삼풍아파트 주민들을 위한 대단지 종합상가로 설계되어 우성건설에서 시공을 맡는 것으로 최초 발주가 되어 공사가 진행되었다. 거의 완공에 가까워질 무렵, 건축주 이준은 건물 용도를 돌연 백화점으로 변경하고 시공사에 원래 예정돼 있었던 4층 위에 1층을 더 얹어 도합 5층으로 건물을 시공할 것을 요구했지만, 시공사인 우성건설 측은 붕괴 위험성을 이유로 증축을 거부했고, 이에 이준은 결국 우성건설과의 시공 계약을 중도에 파기시키고 운영사인 삼풍건설산업이 시공을 이어가게끔 한다. 사실 백화점과 같은 복합 건물은 설계 변경 시 구조 전문가의 검토가 필수적이나, 이준은 그저 수익을 얻을 요량으로 건물의 안전성도 무시한 채 독단적으로 구조 설계를 변경해 버린 것이다. 만일 건축 안전법을 준수하여 무리한 설계 변경만 하지 않았더라면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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